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모두가 알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표정도 읽을 수 없고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상대와 마주한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소통을 시작 할 수 있을지 막막할 것이다.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덤덤하게 그려낸 영화이다. 아무도 손내밀지 못했던 어둠 속 아이와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그 손을 잡아준 한 사람이 있다. 모두가 아는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 앤 설리번의 실화를 바탕으로 소통의 가능성과 인간의 끈기를 조용히 응시한다.
영화는 어린 헬렌 켈러가 고열로 인해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으며 시작된다. 갑작스럽게 빛도 소리도 사라진 세상에서 아이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다. 가족들은 헬렌을 아끼지만 갑자기 생긴 장애로 인해 아이의 분노와 혼란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통제할 수 없는 행동이 반복되고 가족 구성원 누구도 그녀에게 질서와 규율을 가르치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은 따뜻해 보이지만 헬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런 동정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는 교육기관의 소개를 받아 젊은 교사 앤 설리번을 헬렌에게 붙인다. 설리번은 자신도 어린 시절 시력을 잃었다가 되찾은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헬렌을 단순히 가엾은 아이로만 보지 않고 마냥 동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헬렌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설리번은 헬렌에게 사물의 이름을 손바닥에 철자로 써주는 방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 인형을 만지면 ‘d-o-l-l’, 물을 마시면 ‘w-a-t-e-r’라는 식이다. 그러나 헬렌은 철자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시각과 청각 모두 잃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에게 손바닥 위 철자들은 그저 익숙하지 않은 촉각일 뿐이다. 수없이 반복해도 반응은 없고 좌절만 쌓여가게 되는데 설리번은 물러서지 않고 헬렌을 포기하지 않는다.
헬렌의 폭력적인 행동에 맞서며 규율을 세우고 식사 예절부터 생활 태도까지 하나하나 바로잡아간다. 가족들이 너무 오랫동안 헬렌의 마음을 불쌍함이라는 동정의 울타리로 덮어왔던 탓에 그녀는 이 훈육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강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설리번 선생님은 진짜 사랑은 규칙을 세워주는 것이며 헬렌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결국 하나의 단어가 진심으로 이해되는 순간에 있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 끝에 헬렌은 우물가에서 손에 흐르는 물을 느끼던 중 돌연 멈춰선다. 바로 그 순간에 선생님이 써준 손바닥 위에 써주던 ‘w-a-t-e-r’가 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단어와 의미가 연결되는 이 마법 같은 순간에 헬렌은 처음으로 세상과 연결되게 된다. 철자는 더 이상 허공의 움직임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사물이 되고 감정이 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잇는 언어가 된다.
그 순간 헬렌은 설리번의 팔을 붙잡고 계속해서 단어를 알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날 밤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설리번의 손을 붙잡고 새로운 단어를 배운다. 단지 단어 하나를 이해했을 뿐인데 그 순간부터 헬렌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영화 미라클 워커가 감동적인 이유는 이 이야기의 승리가 단지 헬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설리번 역시 무너질 듯한 좌절과 고립 속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망이 없을거라고 포기하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일을 해낸 건 그녀가 자신에게조차 끝까지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변화하는 만큼 선생님도 함께 성장해간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이 결국 얼마나 많은 인내와 믿음을 요구하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배우들의 연기도 이 이야기를 더욱 힘있게 만드는데 앤 설리번 역을 맡은 앤 밴크로프트는 결단력 있는 교육자이면서도 상처를 간직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헬렌 켈러를 연기한 패티 듀크는 말 한마디 없이도 전신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헬렌을 가르치기 위해 헬렌과 설리번 선생님 두 사람이 식탁에서 서로를 향해 격렬하게 부딪히는 장면은 영화 내내 가장 치열한 순간이며 동시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는 단지 과거의 인물에 대한 일대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자신만의 벽에 갇혀 있고 또 누군가는 그 벽을 부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것을 말한다. 그들이 서로를 믿고 포기하지 않을 때 기적은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헬렌이 결국 장애를 딛고 유명한 연설가가 되고 사회운동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영광의 순간보다 더 값지고 진한 순간을 담고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아이가 ‘물’이라는 단어 하나를 배우던 그날,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시작이었고 그것이 진짜 기적이었다.
미라클 워커는 누군가에게 세상을 가르쳐준다는 것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완벽한 방법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믿어주는 사람과 끝까지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갈 수 있다. 영화에서 보여준 기적은 바로 그런 믿음으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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